[Book] 장미의 이름

작년 여름에 들었던 서양사 수업 도중에 무언가 영화를 보았었다.
사실 그때쯤에는 수업에는 관심이 그다지 없고 다른 데에 관심이 있었지만,
물론 그래도 역사 수업은 다른 이상한 것들에 비하면 꽤나 관심도가 높았지만,
듣도보도 못했던 영화에는 꽤나 유명한 배우가 나와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고
대형 강의실도 아닌 보통 강의실의 허접한 빔 프로젝터와 빛바랜 스크린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대사들과 더불어 제대로 된 영화 감상을 잔뜩 방해했지만,
그 영화가 보여주는 지적 유희에는 순식간에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솔직히 말하면 에코의 이름은 자주 들어보았지만 그닥 잘 알지 못하고
이 작품 역시 앞서 밝혔듯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기에 부끄럽기는 하지만,
두 권의 작은 책이 듬뿍 담고 있는 매력에는 순식간에 빠져들어 버렸다.
(사실 순식간이라고 말하기에는 읽는데 너무 오랜 날이 걸렸지만.)

첫번째로 나를 사로잡았던 매력은 끊임없는 지적 욕구의 충족에 대한 갈망이다.
알고 싶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물론 말은 좀 이상하지만, 수도사 윌리엄의 개성이며
그 끝없는 지적 갈증은 작품을 이끄는 가장 주된 축인 살인 사건을 풀어나간다.
쉽게 말하면 추리 소설의 탐정 역할을 맡은 윌리엄의 추론과 추리는
요즘 들어서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풍부한 상상력으로 사건을 읽어나가는 모습은
비단 그러한 논리적 추론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그 다음은 중세 유럽사, 그 중에서도 기독교와 관련된 부분에 대한 어마어마한 지식이다.
기본적인 수준의 중세사와 기독교사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실 나름 기본적인 수준은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도 다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꽤나 진지하고 충실하면서도 치열한 정치적, 종교적 서술들이 이어져 나간다.
물론 실제 종교 관계자 측에서는 "소설"이라는 점과 기호"학자"의 글이라는 점에서
전혀 현실과 비슷하지도 않다고 주장할 가능성도 없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황제와 교황 사이의 갈등이나 이탈리아의 도시 등 다분히 정치적인 소재와
기독교 내부의 정통과 이단이라는 대단히 민감한 소재를 풀어내는 서술은
그런 부분에 대한 지식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상당한 기쁨을 줄 것이다.

다분히 중세적인 문어체로 쓰여진 듯한 느낌을 주는 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장황한 문체는 단점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고 아름다운 표현은 그 자체로도 즐겁다.
조금 늘어지는 전개는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충분한 묘사로 읽는 맛을 늘려주고,
가상의 것도 실제의 것처럼 만드는 서술은 마치 아드소의 옆에서 함께 하는 듯 하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글일수록 원어로 읽는 것이 훨씬 즐거울 것이라는 기대와
스스로가 원어본을 읽기에 부족하다는 자괴감은 쓰디쓴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

션 코너리의 아직 정정하던, 물론 얼마 전까지도 충분히 정정했지만, 시절의 모습과
크리스쳔 슬레이터의 파릇파릇하던 시절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보았다면
윌리엄과 아드소의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으면서도
어쩌면 그 모습에 갇혀버려 넓어지지 못할 수 있다는 양면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와 소설의 전개나 마무리가 조금 다른 것도 약간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어느 쪽도 좋지 않아다고 말하기에는 충분히 좋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중세 유럽이나 기독교, 혹은 추리 소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면
절대 읽고 후회할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다만 지적인 욕구가 많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나의 점수 : ★★★★★



장미의 이름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나의 점수 : ★★★★★

by Lucypel | 2007/12/15 20:42 | Review: Book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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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별빛수정 at 2007/12/16 00:07
아, 저도 정작 에코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네요OTL
Commented by Lucypel at 2007/12/16 08:21
별빛수정: 그러게 말이에요. 많이 들어본 듯 한데 막상 아는 건 없는 묘한 상황.. (먼산)
Commented by 쩨인 at 2007/12/16 13:41
말씀하신대로 소재와 문체가 신선하고 흥미진진하지요. 이걸 원어로 읽다간.. 두통에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푸코의 추'는 읽다가 두통나서 중간에 집어치웠어요 ;;
Commented by Lucypel at 2007/12/16 13:48
쩨인: ... 사실 그 두통이 무섭기는 합니다. (..) 이거 우리말로 읽어도 이렇게 어려운 데 말이죠. (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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