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ports] PL 후기 준PO: Sparkyz vs Entus

본좌 마재윤이 승리를 거두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었던가.
내 기억에는, 오늘의 승리만큼 마재윤이 기뻐했던 승리는 없었다.

그 기쁨은 커다란 슬픔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했다.
2006년까지 "본좌"라 불리며 모든 대회를 평정했던 그가
2007년 3월 3일 김택용에게 격파당하면서 그 모든 기세가 꺾여 나갔다.
그리고 이번 후기리그에서는 참담할 정도로 좋지 못한 결과를 내고 있었고
팀의 에이스로 손색없던 그가 팀플까지 출전하는 냉대를 겪어야만 했다.
경기에 나왔을 때 승리보다 패배가 많아진 그를 향해 팬들은 실망했고
공공연히 "본좌" 대신 "막장"이라는 수식어가 더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얼마전 칸과의 정규 리그 경기에서 이성은에게 패배를 당한 후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규정 위반임을 알면서도 경기 종료 전에 헤드셋을 벗어던지고 gg 선언 후 문을 박차던,
자신의 무기력함에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듯한 마재윤의 뒷모습을.
한 때, 아니 한 때라는 짧은 시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긴 시간을
그 모든 선수를 자신의 발밑에 굴복시켰던 그가 분노한 모습을.

그리고 오늘도 마재윤은 분명 1패를 기록했고, 그것이 팀을 흔들리게 했다.
백두대간에서 펼쳐진 이승훈과의 4세트는 에이스 결정전과 함께 최고의 경기였다.
프로토스의 대재앙으로 군림했던 마재윤을 상대로 겁없는 반항아 이승훈은 호기롭게 맞섰고
빠른 템플러 게릴라를 작렬시키고 센터를 휘어잡는 등 끊임없이 마재윤에게 도전했다.
호전적이면서도 탄탄하게 경기를 이끌어 간 이승훈에게 마재윤은 휘둘리는 듯 했고,
빠르게 업그레이드와 테크를 올리며 하이브 유닛으로 승부를 걸어보았지만
자원 수급 상황에서 밀리지 않는 프로토스는 저그를 상대로 불리할 것이 없었다.
파괴 직전의 넥서스를 살려내며 이승훈은 버텨냈고, 결국 유닛 조합을 갖추어냈다.
질럿-드라군-아칸의 뒤에는 템플러와 리버가 화력을 지원했고, 멀티 방어도 단단했다.
계속해서 울트라-저글링-디파일러 조합으로 몰아치던 마재윤의 자원은 차츰 떨어졌고
끝끝내 추가 멀티를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멀티를 늘려나간 이승훈에게
본좌 마재윤은 자신의 하락세를 스스로 증명해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에이스 결정전, 웅고로 분화구에서 박명수와 마재윤.
단 한 합, 정확히 한 순간, 아주 똑같은 빌드로 출발한 두 선수의 단 한번의 전투.
마재윤은 가스를 캐는 드론의 숫자마저 하나, 둘, 셋에서 계속해서 변화를 주며 틈을 노렸고
스파이어 완성 직전 타이밍에 저글링의 수를 급속히 늘리며 박명수의 앞마당을 압박했다.
단 몇 초만 늦었더라도 스파이어는 완성되었을 것이기에 박명수는 뮤탈을 기다렸고,
그 몇 초를 노리고있던 마재윤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정확히 비집고 들어가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팀원들의 손이 부서져라 하이파이브를 쳐올리는 마재윤.
비록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서서 팬들에게 멋진 승리의 세레머니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뒤돌아선 채 팀원들의 축하를 듣고 있는 그의 귀는 빨갛게 달아올라 그의 눈물을 대신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정점에서 나락까지 추락했던 선수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추락했다 다시 한번 정상까지 올라왔던 선수들도 알고 있다.

많은 팬들에게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에버 2004 스타리그에서
임요환은 아주 오래전부터 더이상 우승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조롱을 견뎌내고 결승에 섰고
기적같은 경기를 보였음에도 제자 최연성에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에게 축하의 한 마디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무대 위에서, 그리고 무대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팬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윤열도, 최연성도, 마재윤도, 그 누구보다도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던 그였고
그런만큼 깊은 나락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감수해야했던 그였기에
비록 최초 3회 우승의 대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 눈물은 커다란 가치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최초 3회 우승이라는 허울을 이어받아 이뤄낸 뒤 눈물을 흘렸던 이윤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던 천재가 오프라인 예선까지 추락하며 돌아올 것 같지 않았고
부친상을 당하며 개인적으로도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야만 했던 아직 어린 나이의 그는,
보란듯이 돌아와 그 누구도 달성한 적 없었던 스타리그 3회 우승의 대기록을 만들었다.
후일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가 이전까지 만들었던 그 어떤 우승의 순간보다도
바로 그 순간, 신한은행 2006 시즌 2의 우승이 가장 기뻤을 이윤열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우승을 바치며 다시 한번 값진 눈물을 흘렸다.

오늘 마재윤이 거둔 승리는 임요환과 이윤열이 거뒀던 것보다는 가벼울 지 모른다.
더 깊은 나락까지 떨어졌던 마재윤이 아니고, 더 큰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경기가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오늘 마재윤의 눈가에 빨갛게 맺혔던 눈물은 절대 가벼울 리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한계에 좌절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다시 일어선 사람만이 흘리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한 상대인 자기 자신에게 승리하고 흘린 눈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재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그가 있어 e-Sports를 지켜본다.
수없이 많은 경기가 무가치하게 지나가버린다 해도
임요환이, 이윤열이, 마재윤이, 또다른 누군가가 승리할 것이라 믿기에
이 세상의 마지막 경기가 펼쳐질 그 순간까지 지켜볼 것이다.


덧.
SplashImage 2004년 11월 20일 사진 한장의 링크.
무대 위에서만 그가 눈물을 흘렸다면, 그는 그저 부러웠던 것 뿐일 것이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한참동안이나, 무대 뒤의 방 한켠에서,
황제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혼자 울고 있었다.
내 인생 최고의 경기 중 하나는, 그날 펼쳐진 4경기이다.

by Lucypel | 2008/01/12 18:02 | Review: ProLeagu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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