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s] Carling Cup Semifinal: Tot vs Asnl

완벽했다.
완벽한 복수였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짜릿한, 완벽한 복수.
오늘의 화이트 하트 레인은 쿼드러플을 달성한다고 해도 이보다 더할 수 없었을
그러한 열정과 함성과 기쁨의 도가니였다.

오늘 경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저메인 제나스였다.
잉글랜드 국가 대표 출신의 중앙 미드필더인 제나스는
경기 내내 헌신적이고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아스날을 틀어막았다.
게다가 경기 시작 3분만에 쏘아올린 선제골과 종료 직전의 도움까지,
공수 양면에 걸쳐 완벽에 가까운 기량을 선보이며
모든 홈 팬의 성원을 홀로 받을만한 결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나스가 혼자 주목받아서는 안된다.
오늘의 토트넘은 그야말로 열한명 모두가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체르니 골키퍼와 이영표-킹-도슨-심봉다로 이어진 포백 라인은 단단했고
말브랑크-제나스-타이니오-레넌이 조합된 미드필더들도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했다.
그리고 최전방에 나선 영혼의 파트너 로비 킨-베르바토프 투톱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물론 다소간의 과장이 섞여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한준희 해설의 말처럼 오늘의 베스트 일레븐은 역사에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체르니 골키퍼는 로빈슨을 밀어내고 당당히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로빈슨과 같이 번뜩이는 수퍼 세이브를 자주 기록하는 선수에 속하지는 않지만
무난하고 기복 없는 수비력으로 최근 토트넘의 골문을 계속해서 지켜주고 있다.
다만 긴 패스의 정확도나 비거리, 속도가 다소 부족한 점은
역습 상황에서 빠른 공격 전개를 도와주지 못하고는 있지만,
오늘도 보여준 무난한 선방들은 그런 단점들을 잊을만 했다.

계속해서 기용되고 있는 주전 포백은 확실히 킹의 가세로 대단히 탄탄해진 느낌이 되었다.
과감하고 강력하면서도 간결하고 깨끗한 태클을 구사하는 킹의 수비력은 일품이고,
킹의 영향인지 도슨의 수비 역시 대단히 효과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수비적으로 움직이는 이영표는 킹의 후원을 받으며 좋은 위치를 선점해내었고
심봉다는 공격에서도 레넌을 도와 상대의 왼쪽 측면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특히 월컷-흘렙-사냐로 이어지는 아스날의 오른쪽 공격을 맞이한 왼쪽 측면은
말브랑크와 이영표의 협력 수비가 빛나는 동시에 킹의 적절한 후방 지원이 돋보였다.

미드필더 라인은 공수에서 대단히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아스날을 압박했다.
수비 상황에서는 포백 라인의 앞에서 상대의 공격을 저지했는데,
상대가 문전으로 돌파하거나 패스를 시도할 때에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상대에게 공간을 주지 않고 숫적 우위를 가져가며 기술적인 부족을 보충했다.
반면 아스날 특유의 패싱 게임으로 점유율을 늘려가려는 순간에는
다시 앞으로 나서며 상대의 중원을 압박하며 재빨리 역습으로 전환했다.
거의 접고 펴는 수준으로 빠르게 밀집 수비와 압박 수비를 펼쳐낸 토트넘은
소리소문없이 수비적인 역할을 수행해 준 타이니오를 비롯해서
빠르게 공수에 가담하는 말브랑크와 오른쪽 측면을 책임진 레넌이 활약했다.

말브랑크와 레넌이 가담하는 공격진의 파괴력도 상당했다.
로비 킨과 베르바토프는 시종일관 앞뒤로 자리를 바꿔가며 상대를 공략했고
갈라스마저 번번히 돌파당하며 계속해서 토트넘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게다가 레넌과 제나스마저 갈라스와의 경합에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자
불안한 호이트가 자리잡은 센터백을 공략하는 것은 토트넘에게는 손쉬운 일이 되었다.

이렇게 토트넘이 최상의 전력을 마음껏 뽐내며 상대를 공략한 반면
아스날은 전혀 아스날답지 못한 경기력으로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특히 간결하고 섬세한 패스를 중심으로 경기를 지배하는 아스날의 공격은
오늘만큼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져 있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이른 시간에 선제골을 내어준 데에 있을 것이다.
경기 시작 3분만에 제나스에게 일격을 당한 아스날의 어린 선수들은
시작부터 초조하게 공격에 임해야만 했고, 이것은 패스를 흐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서둘러 득점하려는 욕심은 공격 속도를 점차 빠르게 만들었고
이것은 아스날 본연의 차분한 움직임에서 빠르게 골문으로 전진하는
전술적인 전개에 어울리지 않는 다급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거기에 전반 초반 데니우손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파브레가스가 투입된 것도 좋지 않았다.
마치 잘 짜여진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움직이는 것이 아스날의 공격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소재로 장인이 만든 훌륭한 톱니바퀴를 넣는다고 해도
그 크기가 주변의 것들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도리어 좋지 못한 법이다.
파브레가스는 분명 경기를 뒤바꾸어놓을 수 있는 커다란 재능의 소유자이기는 했지만
그의 투입은 전체적인 팀의 밸런스를 향상시키는 데에는 도리어 좋지 못했다.
이는 선발 출장한 흘렙이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스날은 전반적인 수비 조직력도 좋지 못했다.
선수들 사이의 간격이 다소 멀어지면서 상대에게 공간을 내어주었고
제나스의 선제골 장면에서는 모두가 물러나기만 하면서 압박을 하지 못했다.
후반에는 이미 뒤지고 있다는 심리적인 부분이 크게 작용하면서
수비 라인을 상당히 앞으로 끌어올렸지만 그것이 또다시 약점이 되었다.
베르바토프가 후방으로 내려와 공격의 시발점으로서 활약하게 되면서
킨과 레넌, 말브랑크가 재빨리 넓게 열린 아스날의 뒷공간을 공략할 수 있었고
이는 세번째 골과 네번째 골, 그리고 마지막 다섯번째 골로 이어졌다.

베르바토프는 전반에는 최전방에서 활약하며 상대 수비를 괴롭혔지만
전체적으로 최상의 상태는 아닌 듯 매우 좋은 기회를 놓치며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여전히 우아한 발재간과 센스 넘치는 움직임으로 공격을 풀어나갔고,
후반에는 보다 아래쪽으로 자리를 옮겨 공을 소유하고 전방으로 연결하며
발빠른 동료들이 역습을 성공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해냈다.

제나스와 베르바토프가 팀의 승리에 환상적인 보탬이 되었다면
벤트너 역시 토트넘의 승리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며 좌절하고 말았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환상적인 헤딩골로 토트넘에게 두번째 골을 선사한 벤트너는
그 완벽한 헤딩으로 자막마저 아스날의 점수가 올라가도록 만들어 버렸다.
후반에도 세번째 실점 이후 완벽한 기회에서 멋진 바이시클 킥을 성공시켰지만
전반에 제나스를 도왔던 골대가 이번에도 토트넘을 도우면서 득점에 실패했고,
경기 내내 동료의 슈팅에 맞는 등 불운한 모습으로 경기를 마치고 말았다.
특히 자책골 이후 분노하는 갈라스의 뒤에서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던 모습은
아직 어린 선수에게 너무 커다란 시련이 닥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만들었다.

아데바요르와 에두아르도의 투입 이후 아스날은 한 골을 성공시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데바요르의 개인적인 기량에 근본을 둔
킹과 도슨의 다소 성급한 수비가 부른 골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이미 넘어가버린 승부의 추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질 수는 없었다.

제나스, 벤트너, 로비 킨, 레넌, 말브랑크로 이어진 골 폭풍에
화이트 하트 레인은 마치 리그 우승이라도 차지한 양 환호에 휩쌓였다.
모든 관중이 일어서서 끊임없이 큰 목소리로 응원가를 불러댔고
관중석에 가까워진 아스날의 선수들을 큰 소리로 놀려대며 승리를 즐겼다.

웽거의 아스날을 상대로 9년 동안이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그 비참한 세월을,
북런던 더비라 불리우는 역사적인 매치업에서 내리 패해야만 했던 치욕의 순간을,
오늘의 골 폭풍으로 칼링컵 준결승이라는 중요한 시점에서 모두 다 갚아준 셈이다.

짜증을 부리며 관중석을 떠나는 팬들과 경기 종료 후 피치에 주저앉은 선수들.
지난 세월에서는 언제나 스퍼스의 팬들과 선수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오늘만큼은 거너스의 팬들과 선수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이영표는 그런 스퍼스의 일원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고,
후안데 라모스는 아르센 웽거를 넘어서서 웸블리로 향할 것이며,
앞으로의 북런던 더비는 더욱더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그리고 축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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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pel | 2008/01/23 07:57 | Review: EPL/FA | 트랙백(2)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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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朝霧達哉 at 2008/01/23 11:49
정말 기대도 안했는데 그렇게 대승을 거둘 줄 몰랐습니다...
이제 남은건 리그 내에서 승리인가요...[올해는 북런던 더비가 더 없으니 내년에나...]
Commented by 홍돈 at 2008/01/23 13:58
망할...저녁에 먹은 생선구이가 잘못되서 탈이나는 안습사건이 저에게..(...)
덕분에 이경기 놓치고 9시부터 보카 경기나 봤습니다 쿨럭.
다운로드만이 살길! 간만에 관광 탄 아스날 좀 봐야겠습니다! 하하하하
Commented by 바죠 at 2008/01/23 15:45
잘 읽었습니다. 리뷰 감사합니다.
Commented at 2008/01/23 15:4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GrayFlower at 2008/01/23 16:01
정말 끝내주는 경기였습니다~ (중립팬의 입장에서도 말이죠.) 오늘의 토트넘 선수들은 그야말로 죽을각오로 뛰어줬고, 아스날은 지난시즌의 안풀리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더군요. 오늘 토트넘이 보여준 경기력과 기세라면 앞으로의 리그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됩니다.^^
Commented by Lucypel at 2008/01/23 17:57
朝霧達哉: 스퍼스 팬들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의 승리가 더 절실하겠죠. 굳이 리그가 아니더라도 정상 전력의 아스날을 그들의 홈에서 꺾는 것만이 이번 승리보다 기쁠 겁니다. :)

홍돈: 아아, 아스날이 어설프게 덤빈 듯한 느낌이 참패의 원인인 것 같아요. 그나저나 건강은 꼭 챙기세요. 객지 생활하시는 분께서 아프시면 안됩니다.

바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익명: "상대의 왼쪽" 입니다. 아스날의 왼쪽 수비진을 괴롭혔다, 라는 느낌으로 쓴 부분이에요. :)

GrayFlower: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대단히 좋았던 경기였죠. 어떤 분 말씀처럼, 제나스가 매일 이만큼만 해주면 토트넘 전력이 훨씬 더 안정될텐데요. (웃음)
Commented by 아이리스 at 2008/01/24 10:17
언제나 아스날의 동네북 신세이던 토트넘이지만 수요일 새벽만큼은 정말 압도적이었죠;; 제나스는 잘할때는 무섭게 잘하다가도 안될때는 존재감이 없는 기복만 줄인다면 좋을듯 합니다. 아직 나이도 많지 않고...
Commented by Lucypel at 2008/01/24 11:34
아이리스: 어렸을 적부터 잉글랜드 대표에서 베컴의 빈자리를 메웠던 선수인데 말이죠. 어쨌든, 앞으로의 선전을 좀 더 기대해봐도 괜찮을 듯 하더군요. 특히 토트넘은 앞으로 남은 일정에서 리그 순위가 대폭 상승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팀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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