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s] EPL 25R: ManU vs Tot

정신력에서 완패했다.

이번 시즌 맨유는 이런 경기를 꽤나 자주 보여주고 있다.
보통 한경기 무척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그 다음 경기에서 무너진다.
지난 포츠머스전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고 쾌승을 거둔 다음
이번 토트넘전에서는 무기력한 경기력으로 한심한 결과를 만들었다.
어쩌면 지난 경기의 달콤한 승리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일수도 있고
연이어 벌어지는 경기의 강행군에서 체력적인 위기를 맞이한 탓일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의 모습은 정신적으로 나태한 느낌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발이 피치 위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다른 어떤 팀보다 맹렬한 공격 속도를 자랑하는 유나이티드의 공격진이
역습시에도 재빠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낙제점이다.
90분 내내 최전방부터 최후방까지 모두 움직여낸 루니를 제외한다면
테베즈도 호날두도 그닥 많은 장면에서 빠르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특히 긱스의 기동력 저하는 하루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 시즌 들어서 급격한 노쇠화의 길을 걷고 있는 긱스는
아직까지도 왼발의 마법은 건재하지만, 더이상 재빠른 선수는 아니다.
어떤 경기에서는 상태가 무척 좋고 어떤 경기에서는 무척 나쁘긴 하지만,
아무리 상태가 좋은 경기에서도 그는 더이상 유나이티드의 공격 속도를 맞출 수 없다.
오늘 경기에서도 왼쪽 윙어로 선발 출장했지만 시종일관 중원에만 머물렀고
단 한 순간도 측면 돌파를 보여주지 못하며 에브라에게 부담을 지워 주었다.

물론 긱스라는 선수의 가치는 돌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시야, 정확한 패스가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있고
오늘같이 중원 싸움에서 밀리고 있을 때에는 중원을 도울 기량도 충분하다.
그는 여전히 너무나도 위대한 선수이지만, 문제는 도리어 거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폭발적인 속도와 체력이 없다면 더이상 경기를 뒤바꿀 마법은 없는 법이다.
애초에 득점에 능한 선수가 아니었던 긱스의 경우에는 더더군다나 그렇다.
그 언젠가 FA컵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보여주었던 환상의 득점은 마법이었지만
그런 마법을 언제나 보여줄 수 있을만큼 긱스의 나이가 버텨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위대한 선수이기 때문에, 쉽게 바꿀 수가 없다.
결국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선수를 그를 대신해 투입해야만 하는데
그의 영광스러운 과거는 그런 교체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긱스와 교체되어 들어온 나니는 만족스러운 활약을 펼쳤다.
공격 속도를 늦추는 데에만 영향을 주었던 긱스와는 달리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재빠르게 공을 돌리고 빠르게 뛰어들었다.
물론 나니의 공격 작업이 인상적인 마무리를 지은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지만
적어도 팀의 움직임을 조금이나마 빠르게 바꾸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했다.

긱스가 있던 때의 유나이티드는 4-3-3이나 다름 없었다.
루니-테베즈-호날두가 포워드 세명으로 움직이고 긱스는 미드필더였다.
하지만 나니가 투입된 유나이티드는 4-2-4로 보아야 옳았다.
최전방에는 네명의 포워드가 계속 자리를 바꿔가며 상대 수비진을 흔들었다.
그리고 유나이티드 본연의 모습은 4-3-3이 아니라 4-2-4다.

긱스는 위대하다.
하지만 이제 그의 위대함은 과거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성질의 것이 되었다.
세명만으로 유린할 수 없는 단단한 수비진을 상대로는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하다.
오늘의, 그리고 라모스 감독의 토트넘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
그런 토트넘을 상대로 긱스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였다.

라모스 감독은 왼쪽에 심봉다를 세우도 알란 허튼을 오른쪽 풀백으로 내세웠다.
호날두를 수비하기 위해서는 발이 무척 빠른 수비수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긱스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묵직한 수비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FA컵에서는 왼쪽에 오하라, 오른쪽에 이영표를 세웠었고,
도슨이 퇴장당하기 전까지 이 풀백들은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주었다.
오늘도 심봉다는 탄력적인 몸놀림으로 제대로 수비라는 것을 해주었고
말브랑크는 거의 윙백처럼 심봉다를 도와 경기 내내 수비에 매달렸다.
허튼은 레넌과 함께 거대한 신체를 앞세워 긱스와 에브라를 막아내었고
긱스는 차츰 밀려나와 중앙 미드필더들과 나란히 서 있어야만 하게 되었다.

정말로 토트넘의 수비진은 대단히 단단해졌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던 선수들은 드디어 제대로 알려주는 감독을 만났고
제나스와 허들스톤은 깊숙히 수비하다가도 순식간에 패스를 전개해 역습을 만들었다.
만약 로비 킨이 무기력하게 기회를 날려버리지만 않았더라도 몇 골은 더 넣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토트넘은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손쉬운 낙승을 거두며 축제를 벌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를 빠르게 압박하고 지치지 않고 뛰어다니는 모습은 인상적이었고
그들의 몸놀림에는 승리에 대한 열정과 희망이 넘실넘실 흐르고 있었다.

스콜스-하그리브스 조합으로 출발해 캐릭-안데르송 조합으로 마무리지은
유나이티드의 중앙 미드필더 라인은 반대로 그닥 열정적이지 못했다.
하그리브스는 수비에서 제 몫을 충분히 다 해주며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한골을 실점한 이후에 필요했던 공격적 재능은 없었기에 교체되어야만 했다.
스콜스는 그답지 않은 계속된 패스 실수로 상태가 좋지 못함을 알리고 있었고
캐릭 역시 무의미한 긴 패스를 남발하며 공격 전개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만 안데르송만이 특유의 날랜 움직임으로 공수 양면에 활력을 주었고
호날두, 나니, 루니 등과 빠른 호흡으로 패스를 주고받으며 공격을 시도했다.
개인적으로는 일찌감치 긱스, 스콜스 대신 나니, 안데르송을 넣어야 하지 않았나 싶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MOM은 누가뭐래도 마크 크레텐버그 주심.
양 팀 모두에게 엄청난 불만을 받아낼 수 있는 것도 대단히 신기한 일이지만
이미 맨유에게 2패나 안겼던 크레텐버그 주심은 오늘 경기도 대단히 강렬했다.
유나이티드에 6장, 스퍼스에 3장, 도합 9장의 경고를 뽑아들었던 그는
시종일관 한심한 모습의 판정으로 일관하며 모든 선수들에게 항의를 받았다.
왠만하면 반칙으로 넘어갈 상황에서도 쓸데없이 경고를 꺼내들거나
경기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한심한 작태들은 꽤나 욕먹을만 했다.
심판 때문에 졌다고 말하는 것은 가급적 해서는 안 될 말이기는 하지만
심판 때문에 경기가 짜증났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해도 되는 것 같다.
적어도 이런 심판이 주심으로 뛰어다닌 경기라면 말이다.

테베즈의 극적인 동점골로 치욕의 패배는 면하기는 했지만,
오늘의 무승부로 아스날에게 선두 자리를 내어주고 첼시에게 쫓기게 되었다.
물론 4점이나 차이가 나는 첼시에게 쫓기는 문제는 그닥 크지 않지만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아스날과 차이가 2점이 된 것은
앞으로의 리그 일정에서 꽤나 신경쓰이는 일이 될 것이다.

아스날과는 리그 경기 뿐만 아니라 FA컵에서의 맞대결도 기다리고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90분 내내 달려드는 거너스의 어린 선수들을 상대로
오늘과 같은 맥빠진 경기력으로 맞선다면 보나마나 결과는 뻔할 뿐이다.
폭풍과 같은, 열화와 같은, 그 어마어마한 기세의 공격력을 되살리지마 않는다면
유나이티드는 더이상 유나이티드가 아니게 된다.

50년전 무너졌던 뮌헨의 선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40년전 되살아난 버스비 경과 그의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단 한 순간이라도 붉은 져지를 입은 발은 피치에 붙어있어서는 안된다.
푸른색 꿈의 구장에 선다면 모든 순간은 공을 향해, 상대의 골문을 향해,
승리를 향해 무섭게 달려들어야만 한다.

정신력을 잃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

by Lucypel | 2008/02/03 02:25 | Review: EPL/FA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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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아문 at 2008/02/03 03:31
오늘의 MOM 클레텐베그 주심이라는거 인정합니다
심판만 생각하면 이성을 잃을 것 같네요;;
절치부심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아스날전을 기대해봅니다
Commented by GrayFlower at 2008/02/03 10:15
뭐,, 요즘들어 토트넘이 보여주는 모습이 워낙에 좋았기에 지난 FA컵에서의 아쉬움을 이번에는 갚아주나 싶었지만 역시나 징크스를 깨기는 어렵나봅니다. 경기가 종료되기까지 몇분을 제외하고는 토트넘이 완전히 경기를 지배했던 경기였습니다. 맨유 선수들은 루시펠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체력문제인지 멘탈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전반적으로 무기력하더군요.
Commented by Lucypel at 2008/02/03 12:35
아문: 이건 뭐, 리버풀이 랍스타 주심 만나는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

GrayFlower: 토트넘의 수비가 정말 좋아진 느낌이더군요. 우드게이트도 아프지 않으니 무서운 센터백이고.. (..) 그래도 사실 조금 더 상대를 휘저었다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고 보이던데, 박지성이 조금 그리운 경기이기도 했습니다. (..)
Commented by 아이리스 at 2008/02/03 13:37
우드게이트가 확실히 살아난 반면 토트넘 수비의 핵이었던 킹은 어쩐지 유리몸으로 변한듯 합니다...
Commented by Lucypel at 2008/02/03 14:09
아이리스: 아니 사실 우드게이트보다 킹이 더 유리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
Commented by keropark at 2008/02/03 22:41
킹은 무릎 부상이 너무 심하다지요...

그나저나 이젠 긱스-스콜스는 같이 뛰게 하면 안될듯...스콜스가 게임 조율을 한다면 그 패스를 받아줄 지성이나 나니같은 빠른 선수가 적합한듯 해요 ㅎㅎ
Commented by Lucypel at 2008/02/04 10:28
keropark: 긱스의 기동력 저하는 좀 심각하더군요. 스콜스가 부상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면 또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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