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ports] Bacchus SL 결승: 이영호 vs 송병구

이영호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나는 불과 한달전에 이영호의 그릇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다고 말했고,
이영호는 불과 한달만에 그러한 나의 섯부른 판단을 한심하다고 증명했다.

최근 이영호를 둘러싼 이 바닥 최고의 화제거리는 소위 "안티 캐리어" 빌드였다.
원팩 이후 앞마당, 두번째 팩토리 이후 빠르게 가스를 캐며 투 아머리를 돌리는 빌드.
빠르게 뽑은 골리앗으로 셔틀 게릴라를 제압하고 탱크를 많이 뽑아 지상을 방어.
꾸준한 정찰로 상대의 동태를 완벽하게 파악하며 멀티를 차근차근 먹어 나가고
캐리어도 아비터도 빠르게 풀업을 완료한 메카닉으로 완벽하게 제압하는 빌드.
이영호가 들고 나온 이 빌드는 오영종과 김택용과 송병구를 꺾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완벽한 프로토스전의 테란 빌드라고 극찬했고,
또 일부에서는 그러한 빌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미 곰TV 인비테이셔널에서 그 빌드에 무릎을 꿇었던 송병구 역시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준결승 이후로 불철주야 노력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승부는 거기서 갈렸다.

간단히 말하면, 송병구는 안티 안티 캐리어 빌드를 선택했고,
이영호는 단 한 경기도 안티 캐리어 빌드를 선택하지 않았다.
마치 항상 이기는 주먹을 내던 송병구를 상대로 보자기를 만들어낸 이영호가
그런 보자기에 대항해서 가위를 낼 송병구를 상대로 보자기를 내지 않은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경기 전 인터뷰에서 빌드의 자신감을 드러낸 이영호가
영악하리만치 심리전을 펼치며 송병구를 완벽하게 제압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온갖 최연소 기록은 죄다 갈아치우고 있는 그 어린 이영호가 말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송병구의 분명한 실책도 존재했다.
송병구의 안티 캐리어 빌드에 대항한 선택은 상당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고,
그 빌드와 운영에 대한 초반 움직임 자체에 흠잡을만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전제 결승에서 프로토스를 만난, 그것도 테란전 역대 최강이라는 자신을 만난
한낱 테란인 이영호가 무언가 변칙적인 경기를 시도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정규리그 결승에만 세번째 오른, 이제는 노련해질 때도 된 송병구가 해서는 안될 실수였다.

물론 이영호가 모든 경기에 변칙적인 운영을 선택하리라는 것은
그 옛날 임요환이 홍진호를 상대로 3연속 벙커링을 시도했던 것과 같이
일반적인 예측을 벗어나는 상당히 도박적인 선택임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 경기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결승에서는 독특한 선택을 하는 선수가 존재해왔고,
그런 선수들의 승률은 매우 좋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안티 캐리어 빌드에 대한 자신감을 마구 드러낸 이후, 선택하지 않는 모습.
쏘원 스타리그에서 다크를 강조한 뒤 5경기에서 쓰지 않았던 오영종이나
에버 스타리그에서 2스타 레이스로 대부분의 경기를 선택했던 임요환이
오늘 인터뷰부터 심리전을 시도했던 이영호와 겹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영호의 상황 판단과 전략 선택은 그야말로 탁월했다.
드라군이 본진 쪽으로 회군한 것을 눈치채고 순식간에 앞마당을 조인 1경기와
과감한 전진 BSB로 삽시간에 경기를 끝내버린 2경기의 빌드 선택도 무척 좋았지만,
초반부터 불리한 경기를 맞이했던 3경기에서의 전술적인 판단은 환상적이었다.

질럿 한기와 드라군 한기의 공격적인 움직임에 머린을 다수 잃었고
첫 탱크마저 드라군 찌르기에 잃으며 앞마당 타이밍이 늦어버린 이영호는
과감하게 팩토리를 다섯까지 늘리며 빠른 진출 타이밍을 선택하는 강수를 두었다.
애드온 된 팩토리 하나에서 탱크를 소수로 유지하며 벌쳐만 다수 추가하는 선택은
물량이 폭발하기 직전의 프로토스에게 탱크 일점사를 해야 하는 압박을 주었고
그 와중에 신들린 컨트롤과 다수의 벌쳐는 탱크 대신 드라군의 수를 줄여버렸다.
결국 칼날같은 단 한순간의 타이밍에 순식간에 밀려버린 송병구는 패배했고
최연소 우승자의 명예는 박성균에게서 이영호로 넘어와 버렸다.

정리하자면, 나이 어린 이영호의 환상적인 심리전에 송병구는 완전히 말렸고
그것은 곧장 이영호의 차세대 테란 등극과 송병구의 콩 라인 황태자 즉위로 이어졌다.
프로리그 우승이 없는 매직엔스는 그래도 개인리그 우승으로 한을 달랬고
프로리그 우승이 있는 칸은 여전히 개인리그 우승이 없으며 한을 삭혔다.

개인적으로는 이영호의 뒤에서 불꽃의 그림자가 아른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기 시작 직전의 인터뷰에서 당당히 안티 캐리어 빌드의 강력함을 외친 후에
마치 노렸다는 듯이 송병구의 빌드를 예측하고 과감한 선택을 하는 모습은
아무리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빌드를 머리속에 익혀둔 채 필요할 때 꺼내쓰는
신동이자 어린 괴물인 이영호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노련하고 영악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멋지게 하이파이브를 날릴 수 있는 코치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는 얼마전 은퇴하고 트레이너로 전향한 스타리그 우승자, 변길섭이 있을 것이다.
침착하고 영리한 상황 판단과 노련한 심리전, 그리고 영악한 인터뷰까지,
뒤에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린 이영호가 할 수 없었을 것 같고
그 뒤에 서 있을 사람 중에서 뇌리를 스치는 것은 역시나 변길섭이었다.

어쨌든 이영호는 이제동과의 MSL 8강 패배 이후 다시 한번 각성했다.
그 각성은 무척이나 강렬해서 이제동을 연파하는 괴력을 만들어내었고,
그것은 연이어 오영종, 김택용, 그리고 송병구마저 연파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작년 전기리그에서 임요환을 상대로 흔들리며 무너졌던 이영호는
두어번의 각성을 지나 그야말로 차세대 테란의 선두 주자로 성장했다.

모든 빌드를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심리전에도 능한 선수.
완성형에 가까운 선수가 또하나 늘어났다.

by Lucypel | 2008/03/15 23:02 | Review: SL/MSL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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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Hwoarang In .. at 2008/03/16 07:45

제목 : 이영호 박카스배 우승했넹...
사진출처 : http://spl.fighterforum.com 이영호 선수가 박카스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우승을 했네..오늘 경기는 대략 십분 이내에 모두 끝냈기 때문에 - 마지막 경기는 이십분 갔나... - 시작한지 한시간도&nbsp......more

Commented by 시이나 at 2008/03/15 23:31
캬.. 이영호가 이겼군요..

개인적으론 공룡병구가 이기길 바랬건만..

이제 홍진호 선수 처럼 되는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ㄷㄷ
Commented by Lucypel at 2008/03/16 02:24
시이나: ... 이미 콩라인 입니다... (응?)
Commented by hwoarang at 2008/03/16 07:45
제가 보기에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바로 삼경기에서 지나가는 프로브를 - 두번째 멀티를 하기 위해 - 근처에서 보던 벌쳐가.. 그냥 할 일없이.. 들어간 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못봤을 것이라고 생각도 했는 데.. 그 벌쳐가 들어가자마자 얼마 있지 않아.. 바로 치고 나오더군요.. 마치.. 멀티타이밍을 노려 나온다는 듯이.. 말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변길섭의 노련함이 분명히.. 어린괴물의 인터뷰에서 그대로 들어나는듯 하였습니다.. 삼대영이 아니면..안된다는 후기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고요.. ^^

트랙백 보냅니다.. ^^
Commented by Lucypel at 2008/03/16 12:05
hworang: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저는 벌쳐가 프로브 하나를 그냥 놓친 줄 알았었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어린 이영호가 노련해지니 정말로 무섭습니다. 상황 대처도 너무 좋구요.
Commented by Reign at 2008/03/16 17:08
이미 송라인이죠(...)
대충 꼽아보니, 결승에서 대 저그, 대 토스, 대 테란전 패배로 전종족 상대 준우승.
3:2패, 3:1패, 3:0패배로 모든 스코어로 준우승.
곁들여서 그파도 준우승 한번했던걸로 기억하구요...
어떻게 보면 콩보다 더 대단한 걸지도(...콩은 대 토스전으로 준우승을 하거나 하진 않았을;;;)

그나저나, 이제 스타판은 그닥...묘환이형 제대 언제하나염...
Commented by Lucypel at 2008/03/16 19:01
Reign: 전종족 상대, 전스코어 준우승의 기염이지요. 오로지 테란전으로 독야청청하는 콩과 여기저기 들쑤셔보는 뱅의 대결인가요. (웃음) 그나저나, 이제 일년도 안 남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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