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s] EPL 31R: ManU vs Ast by Lucypel

올드 트래포드는 열아홉 소년이 만들어낸 엄청난 기적으로 붉은 함성에 뒤덮혔다.

한번의 주말을 국가대표 주간으로 보내야만 했던 유나이티드는
지난 리버풀전과 풀럼전에서의 참혹한 연패를 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대단히 좋지 못했던 흐름의 시즌에서 잠깐 벗어나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좋았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서 경기를 치르며 체력적인 부담을 크게 받아야만 했고
지난 경기에서의 퇴장으로 비디치와 스콜스, 루니가 징계를 받게 된 것은 큰 문제였다.
여기에 퍼디낸드와 안데르송마저 부상을 안고 대표팀에서 돌아오게 됨에 따라
당장 빌라를 상대로 포백을 구성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다.

결국 에브라-에반스-네빌-오셔로 구성된 포백은 빌라의 쓰리톱에게 약점을 드러냈다.
시즌 초중반까지 막강한 공격력을 뽐내던 아그본라호-카류-에실리 영의 빌라 공격진은
가혹한 일정으로 인해 최근 체력이 떨어지며 상당 부분 날카로움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 어떻게든 휴식을 취하며 다시금 경기력을 끌어올린 것이 오늘 무척 유효했다.

비디치와 퍼디낸드가 빠진 유나이티드의 센터백 조합에는 더이상 강인한 몸싸움이 없었고
신체 능력만큼은 정상급인 카류는 정확하게 그 틈을 계속 파고들어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다.
특히 경기 초반 네빌이 센터백으로 움직일 때는 에반스를 피해 네빌과 계속 맞부딪히면서
신장 차이를 최대한 활용하는 공격을 보이며 결국 전반 30분 동점골까지 만들어내었다.

체력이 회복된만큼 속도가 돌아온 아그본라호와 에실리 영의 공격 역시 날카로웠다.
에브라를 제외하면 유나이티드 수비 선수들이 따라잡기조차도 버거울 정도로 빠른 이들은
경기 내내 좌우 측면에서 자리를 바꿔가며 쉴새없이 수비를 흔들어 유나이티드를 곤란케했다.
과도한 체력 저하로 유난히 수비 북귀 속도가 늦었던 오늘의 유나이티드에게
이런 발빠른 포워드들은 너무나도 커다란 골칫거리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유나이티드 수비진의 약세와 빌라 공격진의 강세는
전반 14분 호날두의 선제골을 지나 30분 카류의 동점골이 터지는 순간을 통해 드러났다.
밀너와 프리델 골키퍼의 실수로 얻어낸 간접 프리킥을 멋지게 골로 연결시킨 호날두였지만
체력적인 부담으로 수비 장면마다 재빨리 돌아와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렇게 생긴 왼쪽 측면에서의 수비 공백이 베리의 날카로운 왼발 크로스로 이어지면서
네빌의 수비를 완전히 떨쳐낸 카류의 손쉬운 헤딩 동점골로 만들어진 것이다.
체력적인 부담 때문에 수비로 돌아오지 못하는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와 포워드,
그리고 네빌과 카류라는 엄청난 신장 차이의 미스매치가 동점골이 된 것이다.

이후 유나이티드는 네빌을 오른쪽 풀백으로 돌리고 오셔를 센터백으로 배치했지만.
이것 역시 카류에게 오셔를 붙임으로써 얻어낸 몸싸움에서의 이득과 함께
네빌이 오른쪽 측면에서 에실리 영이나 아그본라호를 상대로 보인 열세 때문에
유나이티드가 갖고 있던 수비에서의 불안감을 단숨에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도리어 경기가 후반으로 접어들며 점점 더 초조해지며 공격에 나선 윙어들이
체력 저하까지 더해지면서 수비 가담을 더욱 하지 않게되는 상황으로 이어지며
결국 후반 58분 사실상 치명타나 다름없었던 역전골 실점의 빌미가 되고 말았다.

역전골 실점의 빌미는 호날두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늘 경기 공격 상황에서 유난히 맥을 추지 못하는 장면을 많이 보였던 호날두는
이 장면에서도 너무 쉽게 공을 빼앗긴 뒤 피치 위에 쓰러진 채 수비로 돌아오지 않았고,
공격 작업의 시작 단계에서 공을 빼앗기자 수비 진영에는 수비수 몇명밖에는 없었다.
결국 카류의 느긋한 돌파에도 네빌 혼자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고,
오셔가 네빌의 뒤를 받쳐야만 하는 시간 동안 반대편에서 파고든 아그본라호는
에브라의 눈을 피해 카류의 크로스를 다시금 유나이티의 골문 안으로 밀어넣었다.

선수들은 점점 더 지쳐가는 상황에서 역전골을 허용하며 한숨 쉴 수 밖에 없었던 유나이티드.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나갔음에도 집중력이 떨어지며 연이어 실점하고 결국 패배했던
지난 29라운드 리버풀전과 30라운드 풀럼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유나이티드의 대기 명단에는 그럴싸한 공격 자원도 없었다.
테베즈와 더불어 최장 비행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던 박지성만이 주전급이었고
이번 시즌 갓 데뷔한 웰벡, 그리고 아직 데뷔전도 치르지 못한 마케다 뿐이었다.
그리고 퍼거슨 감독은 결과적으로 경기를 결정지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후반 61분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던 나니를 빼고 마케다를 투입하면서
테베즈와 투톱을 이루어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도록 한 것이다.

사실 마케다의 움직임이 투입 직후부터 눈에 띄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1년생 이탈리안 포워드는 피치 위에 서는 순간부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아직 발도 한번 제대로 맞춰본 적 없는 주전 포워드들과의 호흡은 기대할 수 없었고,
딱 큰 의욕만큼의 공격진에서의 어긋남을 보여주면서 아쉬움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빌라가 더이상 공격적인 부분에 무게를 두지 않으면서
마케다가 만들어낸 약간의 불협 화음이 역습의 빌미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마케다의 투입은, 그것이 그의 기여이든 아니든,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역전골을 성공시킨 빌라는 역습에 참여하는 공격진의 숫자마저 줄이며 수비에 임했고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 유나이티드는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지친 호날두와 늙은 긱스는 매번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의지를 드러냈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테베즈는 후반 80분이 되어가도록 끝끝내 뛰어주었다.
오늘 최고의 활약을 보인 플레쳐는 공수에 걸쳐서 포기하지 않고 맹활약했고
캐릭 역시 점차 정신을 차려가며 공격적인 위치에서 좋은 패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유나이티드의 의지는, 마케다가 불어넣은 활력은, 동점골로 이어졌다.
후반 80분 오른쪽 측면에서 네빌이 올려준 크로스가 박스 안에서 혼전을 만들었고
긱스와 캐릭이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공을 살려낸 것이 호날두에게로 이어졌다.
지난 시즌의 눈부신 영광이 뿜어낸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의 이번 시즌이지만
세계 최고의 에이스 호날두는 눈도 뜨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한 상황에서도
반대편 포스트를 정확히 노리는 슈팅으로 프리델 골키퍼를 좌절시켰다.

남은 시간은 10분, 그리고 주어진 추가 시간 5분.
1분씩 1초씩 흘러갈수록 승리의 기운이 멀어지는 것만 같았던 유나이티드에게
후반 93분 마케다가 만들어낸 환상적인 데뷔골은 소중한 결승골이 되었다.
긱스의 섬세한 뒷공간 패스를 받은 마케다는 단숨에 뒤꿈치로 공을 돌려놓았고
중심을 잃으며 넘어지는 상황에서도 반대편 포스트를 보고 감각적으로 감아찬 공이
프리델 골키퍼의 손을 훌쩍 피해 넘어 골문을 가르는 기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완전히 끝난 것만 같았던 경기의 승패를 뒤바꾸어놓은 것은 열아홉의 소년이었고
누구도 고개를 가로저었던 퍼거슨 감독의 도박은 이번에도 승리를 결과로 맞이했다.

오늘 유나이티드의 경기력은 분명 승리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수비진은 반 데 사르의 연이은 선방에도 유린당했고
지쳐버린 미드필더와 포워드들은 더이상 수비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득점하고 나서는 집중력을 잃었고 실점하고 나서는 의지를 잃었다.
지난 참혹한 연패에서 보여주었던 안좋은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준 오늘도
어쩌면 빌라에게 그간의 낙승들에 대한 댓가를 치뤄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유나이티드는 승리했다.
그리고 그 승리는 그 어떤 승리보다도 간절하고 소중했던 승리다.
뼈저린 패배들로 완전히 잊어버린 것만 같았던 달콤한 승리의 맛을
가혹한 난관을 거치며 다시금 맛보았다는 점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우리의 에이스는 거만한 천재의 리그 득점 기록을 드디어 따라잡았고
잠깐이나마 선두를 차지했다고 득의양양한 오랜 라이벌을 또다시 뿌리쳤다.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피로에도 포기하지 않고 승리를 향해 뛰었던 선수들은
그 매혹적인 향기에 다시금 취하며 또다시 뛸 수 있는 기운을 얻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패배의 쓴잔을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버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유나이티드에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승리다.
그리고 이 승리를 시작으로 또다시 승리해나갈 수 있다.
리저브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퍼거슨 감독에 눈에 들었던 소년은
자신의 데뷔전에서, 자신의 데뷔골로, 어쩌면 이번 시즌 유나이티드를 구원했다.


덧. 마지막 결승골 장면에서 소리를 지른 바람에 목이 쉬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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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아문 2009/04/06 03:42 # 답글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오늘 후배들과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기쁨일 주체하지 못하고 한턱 긁어버린 출혈이 있긴 했지만ㅋ
    아름다운 밤이에요 ㅋㅋㅋ
  • Lucypel 2009/04/06 08:47 #

    정말 아름다운 밤입니다. ㅠㅠb
  • 른밸 2009/04/06 09:04 # 답글

    그래...무승부도 감지덕지지 이러면서 씻으려고 온수 올렸는데 터지는 결승골! 잠들어가던 눈이 순간 번쩍 떠지면서 '으아악!' 비명이 나왔어요. 정말 얼마만에 짜릿한 승리인지...맨유스러운 경기다 아니다를 떠나서 이런 극적인 승리가 다음 포르투 홈경기에 임할 선수진의 사기를 한껏 높여주었겠죠? 거기에 리그 징계로 주전 일부가 휴식을 취했으니 다음 경기에는 오랜만에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여주리라 믿어보겠습니다-
  • Lucypel 2009/04/06 09:09 #

    맨유스러운 경기는 이기는 경기지요. :)

    어쨌거나 너무 오랫만에 이기는 경기를 본 것 같아서 속이 다 후련합니다. 벌써 몇주째 이기는 경기를 못 봤던건지. (한숨)
  • ⓧ프리뮬라 2009/04/06 09:12 # 답글

    이런저런 징크스 다 깨지면서 피본 맨유지만 그래도 빌라는 여전히 소중하더군요ㅠㅠ
  • Lucypel 2009/04/06 09:13 #

    정말, 빌라한테도 내주는 줄 알았습니다. ㅠㅠ
  • 소닉 2009/04/06 21:03 # 답글

    에라, 쳇.ㅋㅋㅋㅋㅋ
    저번 주는 똥줄경기가 많더군요...
    레즈도 92분 베나윤의 결승골
    유나이티드도 93분 마케다의 결승골
    듣기로는 밀란도 90분에 두 골을 몰아쳤다나;;;[무려 쉐바의 어시스트;이제 골만..]
  • Lucypel 2009/04/06 23:56 #

    역시 막강한 A매치 주간의 체력 소모입니다. (...)

    그나저나 셰바는 언제나 살아난답니까. 안그래도 카카 떠난단 소문도 있던데. ㅠㅠ
  • keropark 2009/04/06 21:10 # 답글

    아 정말 올시즌 최고로 극적인 경기가 아니었나 싶네요. 이거 졌으면 리버풀이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처음 우승하는 모습을 지켜봤어야 하는데 다행입니다 ㅠ
  • Lucypel 2009/04/06 23:56 #

    정말 마케다가 해낼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혼자서 한밤중에 난리를 피웠지 뭡니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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