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내리는 비는 하늘이 뿌려주는 샴페인이었다.
지난 35라운드에서 이미 라 리가 우승을 확정지은 레알에게
바로 다음인 36라운드에서 숙적 바르샤와 함께 축제를 벌인 것은
더할나위 없이 환상적인 한 시즌의 마무리였을 것이다.
에투와 데쿠, 밀리토가 빠진 바르샤와 카나바로가 빠진 레알의 승부는
다소 불공평하다 해도 그것이 축구이며 양쪽 모두 충분한 대체 자원이 있었다.
도리어 카나바로의 공백을 에인세로 메워야 했던 레알보다도
보얀, 구드욘슨, 마르케즈를 출장시킬 수 있었던 바르샤가 나았다.
하지만 축구는 선수의 기량만큼이나 클럽의 정신력이 승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미 우승을 차지했지만 바르샤를 제압함으로써 완벽한 시즌을 만들고 싶었던 레알과
이번 시즌도 무관으로 마무리짓게 된 데다 다음 시즌 대대적인 개혁설이 나도는 바르샤.
경기 시작 전부터 소위 "잘 되는 날"의 미소를 보여주던 구티의 모습과
내내 내리는 비 속에서 고개 숙인 남자가 되어야만 했던 레이카르트 감독의 모습은
두 팀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이러한 정신력은 피치 위의 경기력으로 곧장 반영되었다.
라울을 정점으로 로벤-구티-스나이더가 뒤를 받친 레알의 공격진은
쉴새없이 선수들이 자리를 바꾸며 바르샤의 수비진을 흔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뒤에 선 가고와 디아라도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숫적 우위를 가져갔다.
많은 선수가 끊임없이 움직이니 반대편 공간으로의 방향 전환도 손쉬웠고
좁은 공간에서 수비의 압박을 받는다 해도 짧은 패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레알의 첫번째 득점 장면은 그러한 방향 전환과 짧은 패스가, 그리고 클래스가 만들었다.
오른쪽 측면에서 진행되던 공격이 구티를 거치면서 왼쪽으로 빠르게 전개되었고
왼쪽의 로벤이 패스를 주고 들어가던 구티에게 다시 리턴 패스를 넣어주었으며
구티가 살짝 흘려준 것을 라울이 한박자 빠른 슈팅으로 깔끔하게 마무리지었다.
구티와 로벤의 수준 높은 연결이 라울의 환상적인 슈팅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작품.
이로써, 레알의 주장이 바르샤의 주장보다 먼저 웃을 수 있었다.
반면 바르샤의 선수들은 풀어진 정신력으로 저조한 경기력을 보였다.
공이 없는 선수들의 발은 피치 위에서 떨어질 줄 모른 채 그저 서성일 뿐이었다.
공이 있는 선수들도 평소의 섬세한 패스나 날카로운 패스, 과감한 슈팅은 잊은 채
그저 평범한 선수들처럼 행동하다가 물이 오른 레알의 수비에 차단당하기 일쑤였다.
레알의 두번째 득점 장면은 정신을 놓은 바르샤의 수비진이 헌납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페널티 박스 왼쪽 측면에서 프리킥을 내어준 바르샤는 세트피스 수비도 무기력했다.
구티가 올린 크로스를 향해 페페와 라모스, 로벤 등이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반응해서 그들을 따라 움직인 바르샤의 수비는 둘 정도에 불과했다.
순간적으로 빅토르 발데스의 앞에는 흰 선수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고
그나마 수비가 붙지 않았던 로벤은 완벽한 헤딩골을 만들어내었다.
경기 내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수비진을 독려했던 발데스지만
정말로 그가 아니었더라면 바르샤는 더 참혹한 패배를 당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레알의 선수들은 비단 한두명이 아니라 모두가 완벽에 가까운 경기력을 선보였다.
공격진의 움직임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활동량과 기술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보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디아라와 가고의 중원 역시 훌륭한 경기력으로 팀 승리에 기여했다.
다소 투박하고 거친 수비가 가능한 디아라와 섬세하고 유연한 수비의 가고가 함께한 중원은
문제로 지적받던 디아라의 패스 및 공격 전개 능력까지 살아나면서 상대를 압도해나갔다.
레알의 세번째 득점 장면은 그렇게 살아난 디아라의 패스 능력이 빛을 발했다.
오른쪽 측면에서 바르샤의 역습 상황을 차단하는 데에 성공한 디아라는
그대로 측면을 돌파해내며 상대 수비진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보였다.
그리고 중앙으로 쇄도하던 이구아인에게 그야말로 환상적인 패스를 넣어주었고,
이구아인 역시 부드러운 오른발 터치에 이은 왼발 칩슛으로 발데스를 무너뜨렸다.
로벤과 교체되어 방금 피치를 밟은 이구아인의 그림같은 득점 장면에는
중원의 압박으로부터 문전의 패스까지 전달해낸 디아라의 활약이 있었다.
그래도 레이카르트 감독은 우수한 감독이고 바르샤의 선수들은 수준 높은 선수들이기에
경기마다 주어진 세장의 교체 카드를 이용해 경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레이카르트 감독에게 경질 이전의 마지막 기회마저 빼앗아 버렸다.
후반 들어 실빙요를 투입하며 풀백의 적극적인 공격 가담을 도모했던 레이카르트 감독이지만
실빙요가 금새 부상으로 빠지며 다시 에드미우손을 투입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미 전반에 구드욘슨 대신 지오바니 도스 산토스를 투입하며 교체 카드를 사용했기에
후반이 절반쯤 흐른 시점에서, 더이상 감독이 경기에 개입할 여지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레알의 네번째 득점 장면은 바르샤의 불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호빙유의 크로스가 얼굴 쪽을 향하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푸욜은
페널티 박스 안에서 공이 손에 맞는 불운을 경험하며 레알에게 직접 기회를 줘버렸다.
이것을 역시 방금 투입된 반 니스텔루이가 침착하게 마무리지으며 네번째 득점.
레알의 주장이 환상적인 선제골로 기쁨에 포효하며 피치를 떠난 직후에
바르샤의 주장은 내리는 비와 함께 불운의 눈물을 흘려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바르샤에서 제대로 경기에 임한 것은 메시 뿐이었다.
지난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도 메시만이 보였던 것처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은 메시 뿐이었다.
비록 3중, 4중으로 둘러친 레알의 수비 앞에서 골문을 직접 노린 것은 몇차례 없었고,
그 몇차례의 기회마저 카시야스의 멋진 선방에 막혀 득점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수비수 하나둘 정도는 순식간에 뚫어버리는 메시의 능력은 역시나 대단했다.
바르샤의 만회골 장면은 메시의 활약에 유일하게 내려진 보답이었다.
사실 페페-에인세의 센터백 조합은 상당히 무게감이 떨어지는 조합인 데다가
기동력과 공간 장악에서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드러낼 수 있는 조합이었기 때문에,
진작에 이러한 득점 장면에서처럼 공격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중원에서 공을 빼앗은 바르샤는 메시를 통해 공격을 시작하려 했고,
메시는 반대편에서 쇄도하는 앙리를 향해 감각적인 뒷공간 패스를 넣어주었다.
순간적인 역습 상황에서 메시에 시선을 빼앗긴 페페와 에인세는 무기력했고,
라모스가 뒤에서부터 따라붙었지만 앙리의 주력과 피지컬은 녹록치 않았다.
결국 앙리의 전매특허인 슈팅으로 카시야스의 손을 피해 만회골에 성공했지만,
축구는 한 선수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경기가 아니고, 그것은 메시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원 관중이 들어찬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바르샤 선수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한 레알은
지난 35라운드의 영웅이자 두번째 골의 주인공인 로벤을 이구아인과 바꿔주고
클럽의 부주장이자 두개의 도움을 기록한 구티를 호빙유와 바꿔주었으며
영원한 레알의 상징인 라울을 반 니스텔루이와 바꿔주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이번 시즌 우승의 주역들에게 홈 서포터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성 속에서
한 시즌의 완벽한 마무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교체들이었다.
이렇게, 슈스터 감독에게는 더할나위없이 완벽한 시즌의 마지막이 완성되었다.
비록 두 경기가 남아 있는 이번 시즌이기는 하지만, 이미 더이상의 목표는 없을 것이다.
라 리가의 두 시즌 연속 우승과 숙적 바르샤를 상대로 더블을 기록한 이번 시즌.
라울과 카시야스의 종신 계약과 더불어 레알 팬들에게는 환상적인 시즌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 보였던 레이카르트 감독의 바르샤는 한없이 무너져내려
무관의 시즌에 라 리가 2위까지 위태로운 상황을 직면하게 되었다.
이미 팀 내부의 균열은 조직력 붕괴의 수준까지 걱정하게 만들고 있고
공공연히 돌고 있는 다음 시즌의 대대적인 개혁은 선수들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있다.
과연 다음 시즌의 레알은 이번 시즌의 레알만큼이나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그리고 클럽을 갈아엎을 바르샤는 얼마만큼이나 달라져서 레알을 위협할 것인가.
07-08 시즌의 라 리가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레알과 바르샤의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