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시작을 보인 경기가 최악의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유나이티드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앤필드 원정에서의 패배.
지난 시즌 시티와의 더비이자 뮌헨 참사 기념 경기에서 패배했던 것만큼이나
오늘의 패배를 치욕적으로 받아들이고 반드시 더 나아진 경기력을 보여야만 한다.
수많은 역경을 지나 영입한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의 데뷔전이었던 이번 4라운드는
그의 영입 효과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환상적인 시작으로 팬들을 흥분시켰다.
전반 킥오프 3분만에 안데르송의 뒷공간 패스를 받은 베르바토프는
캐러거와의 몸싸움에서 승리하며 공간을 만든 뒤 대각선 크로스를 올렸고,
안데르송이 리버풀 수비진의 눈길을 끄는 동안 달려든 테베즈가 득점에 성공하며
유나이티드가 어째서 그에게 거액을 써야만 했는지를 증명해 주었다.
득점에 성공한 테베즈와 더불어 베르바토프의 뒤에 배치된 루니 역시
리버풀의 왼쪽 풀백으로 출장한 아우렐리우를 괴롭히며 좋은 초반 움직임을 보였고,
다소 쳐진 위치의 스콜스와 캐릭보다 전진 배치된 안데르송 역시 활발히 움직이며
사실상 4-2-3-1과 같은 형태의 전형을 구성하는 데에 기여했다.
하지만 문제는 정확히 이런 좋은 모습이 단 10분 정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3분만의 득점, 그것도 베르바토프의 도움이 터져나왔기 때문에 일찌감치 승리를 예상했던
팬들의 이른 샴페인 시음을 그야말로 산산조각으로 박살내버린 유나이티드의 경기력이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리버풀의 압박에 중원을 완전히 내줘버렸다는 점이다.
제라드와 토레스가 부상으로 선발 출장하지 못한 리버풀을 상대로
상대적으로 쉬운 경기를 풀어나가리라 예상되었던 유나이티드였지만,
알론소-마스체라노로 구성된 리버풀의 중원은 수비만큼은 단단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마스체라노의 끈적끈적한 수비는 현 세계 최정상의 홀딩 미드필더다워서
유나이티드의 공격진과 미드필더들을 모두 무력화시킬 정도로 좋았다.
그에 반해 유나이티드의 중원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무기력해졌다.
지난 시즌부터 기동력이 떨어지면서 쳐진 위치로 자리를 옮긴 스콜스는
수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태클이나 수비적인 위치 선정에서 약점이 있고,
스콜스보다 앞에 선 캐릭과 안데르송의 호흡은 오늘따라 거의 맞지 못했다.
여기에 캐릭이 전반 중반 베나윤과의 충돌로 오른쪽 발목 부상이 재발하면서
후반 킥오프 시점에서 긱스로 교체되어야 했던 것도 크나큰 손실이었다.
게다가 루니와 테베즈, 베르바토프로 구성된 공격진의 예상되었던 약점도 드러났다.
물론 장신인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빠르기는 하지만 호날두보다는 확실히 느린 베르바토프와
키핑 능력은 좋지만 다소 좁은 시야로 역습 속도를 저하시키기도 하는 테베즈의 조합에
공격적인 역할 중에서 가장 부자연스러운 오른쪽 윙어로 출장한 루니가 더해지면서
사실상 공격 속도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느려져 있었다.
베르바토프의 제공권을 활용하기 위해 높은 크로스를 시도하는 것은 좋지만
모든 공격 전개가 그의 머리만 보고 수비진에서의 긴 패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지난 시즌 토트넘이 보여주었던 한심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뿐이다.
중원이 압박당하며 짧은 패스를 통한 중앙 돌파가 제압당하고 있고
제대로 된 윙어가 없어 측면 공격이 되지 않자 긴 패스에 의존하는 공격을 한다.
여기에 수비진에서의 불운과 실수가 겹치면 그 경기는 최악이 되기 마련이다.
동점골 실점 장면에서는 웨스 브라운의 불운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강하게 날아온 슈팅이 에브라에 맞고 굴절되며 어영부영 굴러들어오자
리버풀 포워드를 등진 채 가로막아야 했던 브라운과 공을 걷어낸 반 데 사르는
서로가 왜 하필이면 공을 그리 걷어냈는지, 거기 서있었는지 원망하게 되었다.
딱히 누가 크나큰 실수를 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의 자책골은
첼시가 테리와 바꾸자고 했던 브라운의 만만찮은 불운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반면 역전골 실점 장면은 완벽한 수비진의 집중력 와해로 인한 실수였다.
다른 선수도 아닌 마스체라노의 측면 돌파를 가로막았던 긱스는
끝까지 마스체라노를 가로막지 못하고 공을 살려내게 허용했으며,
옆에서 따라붙었던 비디치는 나갈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집중력을 잃으며
뒤이어 따라들어온 카이트에게 너무 쉽게 크로스를 허용해 버렸다.
바벨에게 완벽하게 자유로운 기회를 내어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이미 두명의 실수는 치명적인 역전골을 앤필드의 리버풀에게 허락했다.
게다가 수비진은 그 이후로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다.
바로 이어진 킥오프에서는 주장 퍼디낸드가 한심한 패스를 로비 킨에게 주었고
그것을 막느라 비디치는 쓸데없는 경고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이어져 버렸다.
후반 투입된 나니는 리버풀의 역습 상황에서 마스체라노에게 쓸데없이 반칙을 했고
이것 역시 경고로 이어지며 도무지 필요없는 경고를 계속해서 받는 악순환을 이었다.
끝내 경기 종료 직전에는 비디치가 무모한 공중 경합을 알론소에게 시도하며
거의 플라잉 엘보 수준의 가격으로 추가 경고, 결국 퇴장당하며
패배한 것에 더해 꽤나 긴 수비 공백을 감수해야만 하게 되었다.
결국 오늘의 패배는 베르바토프의 영입으로 인한 새로운 공격 전술에 대한 부족한 경험과
체력적인 문제 탓인지 완전히 허물어져버린 수비진의 계속된 실책이 가장 큰 원인이다.
길게 적어 놓으면 그럴싸하지만, 쉽게 말하면 공격과 수비가 모두 한심했다는 말이다.
결국 이러한 공수 양면에 걸친 부진은 제대로 된 선수 조합으로 극복해야만 한다.
사실 하그리브스의 늦은 투입 이전까지는 수비적인 미드필더가 없었던 것이
포백들의 지나친 수비 부담을 더욱 가중시킨 것이 수비진의 체력 저하를 더했고,
제대로 된 윙어가 없었던 것은 양 풀백들에게 공격 가담에 대한 부담도 만들었다.
또한 수비형 미드필더가 없었던 점은 공격적인 미드필더들에게도 수비를 강요했고
윙어가 없기에 루니가 계속 측면에만 배치되어야 했던 것도 공격을 무디게 했다.
개인적으로 오늘 경기를 통해 테베즈-베르바토프-루니의 동시 투입은 좋지 않다고 느꼈다.
최전방에서 공을 지킬 줄 아는 장신 스트라이커인 베르바토프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2선에서 전후좌우로 넓게 움직이는 포워드와 날카로운 좌우 윙어가 필요할 듯 하다.
현재 유나이티드의 전력 중에서 2선에서의 포워드로 가장 좋은 자원은 루니이고,
테베즈를 투입하며 루니를 측면으로 돌리는 것은 그의 재능을 낭비하는 듯 하다.
호날두가 돌아온다면 측면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 자명한 가운데 반대쪽 측면은
아직도 철없는 나니보다는 긱스와 박지성이 중용되는 편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앙에서 측면으로 빠져나가는 움직임이 좋은 루니와의 호흡은
역시 측면에서 중앙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이 좋은 선수가 유리하고,
그런 루니의 뒷공간 침투 패스를 활용하기 위해서도 발빠른 윙어는 필수적이다.
여러 가지 다른 공격 형태를 통해서 더 많은 선수들을 동시에 살릴 수도 있겠지만,
공수 균형과 활동성, 이타적인 선수와 이기적인 선수의 적절한 배치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세명의 포워드가 공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은 것이 오늘의 결론.
물론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처럼 체력과 집중력을 모두 잃은 모습을
절대로 다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점이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만 말이다.
덧.
오늘 리버풀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인 것은 역시 카이트였다.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수비까지 적극 가담하는 카이트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고,
중원에서 완벽한 수비를, 측면에서 좋은 공격을 보인 마스체라노와 베나윤도 좋았다.
그리고 실제로 공을 잡고 한 것은 그닥 없는 것 같은 제라드의 투입 이후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리버풀의 경기력은 제라드의 가치를 증명한다.
덧2.
아, 로비 킨의 몸개그도 정상급 수준이었다.